기타/독서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독후감

happy_life 2021. 5. 12. 09:17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우리의 속담은 능력주의와 그 맥을 같이한다. 출신에 상관없이 노력과 재능만 있다면 누구든 상위 계층에 오를 수 있다는 이상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이상은 과거 봉건사회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진실로 공정한가? 우리는 정말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을까? 

 미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공정한 기회를 전제하는 능력주의에 의문을 품게 한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경우 가장 부유한 상위 1% 가정의 출신자가 하위 50%이하의 출신자 전체보다 많다. 우리나라 sky 입학생의 55%는 소득 9~10 분위 출신이다. 필자는 서울 강남의 모 학원에서 재수했는데, 반 60명 정원 중 20명 이상이 sky에 진학했고, 그 외도 대부분 명문대학을 진학하였다. 시골 출신으로 그 학원에 처음 들어가 서울 사는 아이들은 이런 교육을 받아왔나 라는 생각에 좌절했던 기억이 난다. 재수학원을 다니고 또 추가로 대치동의 학원들을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한 달 학원비는 110만 원 남짓 식비나 기타 비용을 포함하면 한 달에 20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나왔을 것이다. 사실 상 집안이 가난해 수능 시험을 다시 볼 기회가 없는 아이와 어릴 적부터 입시에 특화된 사교육을 받고 여유롭게 재수 삼수까지 할 수 있는 아이가 과연 공정한 경쟁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소득의 격차와 명문대 진학률 문제를 차치하고, 재능과 노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다. 개인의 재능은 행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타고난 재능을  높게 평가해주는 사회를 타고나는 것 또한 행운이다. 팔씨름에 재능있는 사람은 야구에 재능 있는 사람에 비해 돈을 더 벌지 못한다. 재능은 모두 비슷한데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재능이 없다면 노력만 한다고 성공할 수도 없다. 평범한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남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차은우가 될 수 없다. 운동을 하루에 10시간씩 해도 줄리안 강의 몸을 가질 수 없다.

 

능력주의는 공정한 기회라는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점 뿐만 아니라, 그 결과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능력주의는 성공과 실패를 오롯이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봉건 사회에서 농노로 태어났다면 힘든 삶을 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낮은 지위가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부담을 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밑바닥에 놓인 경우 개인은 스스로의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자는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계층 불평등을 더 고착화한다. 

 

이러한 내용은 능력주의를 배격하고, 재능있는 자들을 억누르자는 말이 아니다. 가장 잘 달리는 주자에게 납이 들어간 신발을 신길 필요는 없다. 좋은 기회를 가지고 태어나 정말 대충 사는 사람도 있다. 다만 모든 사람의 실패가 오롯이 개인의 열등함으로 설명되는 사회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오롯이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오만에서 벗어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등감과 오만은 궁극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극명하게 나누고 불평등을 고착화한다. 이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용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진실로 개천에서 나는 용이 간혹 가다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몇 안 되는 사례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천에는 이제 미꾸라지만 있을 뿐이다.